신지식 여사에게 듣는 한국 최초 빨강머리 앤의 번역에 대한 이야기 빨강머리앤 소설

   다음의 내용은 신지식 여사님과 채록자인 장미영 님과의 인터뷰를 로맨티스트가 편집하여 구성한 글입니다. 인터뷰는 2007년 5월 여사님의 압구정동 자택에서 장미영님에 의해 진행되었고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빨강머리 앤이 어떻게 번역되고 출판되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입니다.

   신지식 여사님은 소설 빨강머리 앤을 일본의 '무라오카 하나코' 번역의 "빨강머리 앤"을 텍스트로 사용하여 우리말로 번역하여 1962년 이화여고 주보인 <거울>에 처음으로 소개했으며 다음 해 창조사에서 우리나라 처음으로 빨강머리 앤 소설을 출판했습니다. 또한, 신지식 여사님은 교육자, 번역가, 아동문학가로서 평생을 일했고 대한민국 화관문화훈장을 받았습니다.

   여사님의 한국 아동문학에 대한 기여도를 말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아동문학 팬으로서 선생님의 업적을 칭송합니다. 여사님은 우리나라 빨강머리 앤 세계의 살아있는 전설이십니다. 내용을 참고하셔서 신지식 여사와 우리나라 빨강머리 앤의 이해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채록자 : 장미영 (숙명여자대학교 문학박사, 한국어문화연구소 연구원, 숙명여대 국어국문학 강사)

      

책을 처음 접한 사연

   "제일 큰 거로 말하자면 <빨강머리 앤>인데, 그거는 어떻게 해서 제가 하게 됐냐 하면은 1953년에 그러니까 전쟁이 아직 끝나기 전, 6·25 전쟁이 아직 끝나기 전이에요. 휴전이 되기 전인데 53년에 제가 4월에 올라왔는데 집이 안국동 로타리였었어요. 견지동이라고 지금 조계사 있는데... 옛날엔 인사동에 헌책방이 쫙 있었어요. 네, 아주 그 헌책방의 거리였어요. 어느 틈이 달라졌지만은 그래서 저는 틈만 있으면 그 헌책방을 보러 가는 거예요. 헌책방은 책이 싸기도 하고, 그때는 새 책이 없었지요. 그때는 뭐 우리나라가 아주 형편없을 때니까 아마 독립하기 전… 아, 독립은 했고, 6.25사변 전이니까. 어쨌든 아주 50년대라고 하는 것은 출판이 그러니까는 낙후했을 때에요. 그렇기 때문에 인사동 그 좁은 길을 양쪽에 쫙 헌책방이에요. 물론, 일본책들이지요. 그걸 이렇게 내려가고 저쪽에서 다시 올라오고, 이런 식으로 해서 그러고 한참 가다가 그 책방을 가면은 많은 사람들이 서서 읽어요. 돈이 없으니까 서서... 다음에 며칠 있다가 또 와서 읽고 이런 식으로 많은 대학생들이 다들 돈이 없잖아. ... 그런데 하루는 주말에 거기서 <빨강머리 앤>이 요만한 문고판이, 작은 문고판을 제가 서서 읽었어요. 근데 참 아주 그냥 거기에 열중하게 되고, 그리고 그때는 살벌했던 그 전쟁이 끝난 후에, 아직도 하고 있었지만은 반대 총성이 나고. 그리고 폐허가 되고 서울의 거리하고, 거기에 고아들이 많고 그랬는데 뭔가 어우러진 것 같은… 그래서 그걸 샀어요."

책을 처음 접한 느낌

   "그걸 읽었는데 참 재밌더라고 그래가지고 마치 흡입되어지는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그때 학교 선생을 막 시작했을 때지요. 53년이니까. 아, 뭐 학생들도 가난하고 부모도 없는 아이도 많고, 거리에도 그렇고 다 그냥 좌절돼 있는 그런 상태고, 근데 그 앤이 <빨강머리 앤> 주인공 앤이 그런 그 어두운 그 쓸쓸한 속에서도 그렇게 그 명랑하게 자기 상상력과 뭐 이래가지고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 좋았어요. 그래서 아, 이것 좀 이제 아이들한테 읽혀줬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그때도 나는 자신이 없었어요. 왜 자신이 없었냐하면은 내가 좋아한다고 아이들도 다른 아이들도 좋아할 것인가 이런 생각을 했었어요."

여화여고 주보 거울지에 처음 연재를 시작한 사연

   "그런데 마침 우리 학교에 거울이라고 하는 교지가 있는데 거기 그것이 매주 나왔어요. 교지로서는 처음이죠. 고등학교 교지로서는. 그런데 그 교지에서 그 편집 선생님이… 뭔가 재밌는 읽을거리를 하나 찾았으면 좋겠다고 그래요. 그래서 제가 그 얘기를 했어요. 이런 것이 있는데 한 번 해볼까요? 그랬더니 아, 그거 한 번 해보자고. 아이들이 힘이 되고 그럴 것 같다. 그래서 그걸 했어요. 매주 열심히 번역을 했지요. 그땐 처음으로 번역을 하는데, 그래서 그것이 매주니까 그것도 참 힘들더라고. 매주, 주보니까. 꼭 화요일에 나오곤 했는데, 일요일에 꼬박 앉아서 하고 그랬는데. 근데 의외로 그것이 학생들한테 먹혀 들어갔어요. 그래서 아까도 말씀드렸지만은 옛날 졸업생들은 지금도 저를 보면은 선생님 <빨강머리 앤>이요. 지금도 그 얘길 해요. 이제 제가 자기가 너무 좋아서 다음에 딸한테 계승이 돼서 딸도 읽고 있고, 뭐 그렇다고 그런 얘기들을 많이… 나중에 얘길 들었는데… 화요일 오후가 되면은 그것 배부를, '거울'을 아이들한테 주는 시간이, 점심시간에 줬는데, 점심 먹는 그 시간은 아이들이 조용해진다는 거예요. (여고생들이) 얼마나 떠들어요? 그런데 밥 먹으면서 떠들고 그러는데… 그런 얘기를 해요. 그래서 왜, 왜 조용해져요? 아, 그걸 읽느라고 그러는 거라고 그래서 놀라면서 기뻤어요. 아, 그러면 그것이 걔네들한테도 먹혀들어가는구나 이런 생각을 했었어요. 그래서 저도 열심히 더했지요."

창조사에서 출판이 되고 베스트셀러가 된 사연

   "그래가지고 그것이 다 끝났는데. 어떤 출판사에서 그걸 알았어요. 그것을 출판을 했으면 좋겠다고. 연재 한참 하고 있는데 학원사였어. 학원사의 편집장을 하던 분인데, 그 사람이 나와 가지고 다른 출판사를 냈는데 창조사라고 해가지고 냈는데 그 사장님이 그거 한 번 출판해보면 어떻겠느냐 그래요. 아, 출판하는 건 괜찮지만 선생님 그거 내가 그거 원문으로 한 것도 아니고 일본말로 돼 있는 걸… 원문도 없는데 뭐 어떻게 하느냐고… 그건 상관없고, 어쨌든 간에 읽히게 해줘야겠다고 그래서 출판을 했어요. 그랬더니 그것이 잘 팔린 거예요."

전집 시리즈를 출판하게 된 사연

   "세태가 한참 그것이 먹혀들어갈 수 있게끔 되어있었던 것 같애. 다들 마음속에 이제 가난했던 시절이니까 마음이 가난하고 그랬던 시절. 그랬던 것 같은데, 그 다음에 선생님, 사장이 그걸 계속해서 냈으면 좋겠다고 그래요. 그게 열권이거든요. 그 열권 해보자고 한 2년 넘어 걸렸어요. 2년 넘어 걸려가지고 원고로 하면 만장도 넘었었으니까 틈틈이 하니까 그거 하다가 병도 나고. 뭐 그래서 또 쉬었다가 하고. 뭐 이런 식으로 했는데 그래서 전집을 냈지요. 그래서 그거는 잘 했었다고 생각이 돼요. 그때는 젊은 시절이니까 신나게 했지요. 그리고 재밌으니까. 근데 그 <빨강머리 앤>은요, 열권이지만 앤이 결혼을 하고, 앤이 인제 그 어린 시절을 넘어가고, 중학교를 가고, 고등학교를 가고, 선생하고 그 다음에 사랑을 하고, 결혼하고, 아이들 아이를 낳고 뭐 이런 얘기까지 나가잖아요. 그런데 역시 제일 재밌는 게 (첫번째권) 빨강머리 앤이에요. (앤이) 어렸을 때."

빨강머리 앤 출판 후 에피소드

   "그래서 그렇게 해서 그 작품을 했는데 에피소드가 있어요. 재밌는데. 한 번은 학교에 편지가 왔어요. 혹시 그 신지식인지 알고 싶어서 편지를 했다. 중국에서 중국시대에 만났던 초등학교 후배에요. 이름이 신지식이라는 이름이... 별로 흔하지가 않으니까. 쭉 이야기를 썼는데, 자기는 이러이러한 자기 오빠가 있었는데 오빠하고 나하고 동기였었데요. 경주 최 씨야. 해방 후에 여기서 돌아와 가지고 경주에 워낙이 완고한 집안이니까 집안에서 있고. 그리고 혹 그 동생하고 신지식 씨의 동생하고 자기하고 같은 반이었었다. 근데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까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런 이런 편지를 쓰게 됐냐 하면은 딸이 <빨강머리 앤>을 읽고 읽더라는 거예요. 근데 보니까 신지식이래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 어려서부터 내가 작문도 잘 하고 그랬었던 생각이 나니까 혹시 그 때의 그 신지식인가? 그래서 맞거든요. 그래가지고 제가 편지를 했지요. 답장을 해서. 그렇다고 자기 오빠가 어디에 있고, 뭐 어찌고 이런 얘기를 해요. 그래서 오빠하고 한 번 만났어. ... 서울로 올라왔는데 한 번 만나자고, 근데 초등학교 때 만나고 전혀 못 봤으니까. 그러니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가 없잖아. 그래가지고 어디서 만나느냐, 을지로 어디서 만났더라 어쨌든 무슨 롯데 호텔 맞은편 쪽에 무슨 다방이었었어요. 근데 거기서 무슨 옷을 입고 그러면 나는 회색 코드를, 겨울인데 회색 코드를 입고 가겠다고 자기는 뭘 입고 손에다 뭘 들고... 그래서 한 번 만났어요. 그리고 워낙에 그 사람도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었어요. 얘기를 재밌게 이어가지 못하더라고. 그때 <빨강머리 앤>으로 해서 일어났던 에피소드 몇 가지가 있어요. 그게 의외로 많은 애독자들이 있었어요."

프린스 에드워드 섬에 직접 간 이야기

   "제가 소원이었었거든요. 언젠가는 가보리라. 50년대, 60년대라고 하는 것은 우리나라가 여행이라고 하는 것은 꿈도 못 꿀 때였으니까 그랬을 때였으니까. 그저 그 별처럼 생각을 했었지요. 어딘가 간다고 하는 것이 여행을 좋아해도. 그런데 그렇게 참 좋은 세월을 만나서 그 한 번 거길 갔지요. 외국을 제가 많이 갔으니까 우리 제자가 캐나다 프린스 에드워드 섬 가자고. 그 친구는 미국에 있는 아이니까. 그래서 언제 갔냐 하면은요, 99년 9월에 갔어요. 왜 9월에 갔냐 하면은 거기를 가느라고 한국에 일찍 못 돌아왔어. 왜 그러냐면 연기를 했어. 유명한 관광지가 된 거야. 그것이 오로지 그 작가 한 사람 때문에 그러니까 몽고메리, 루시 몽고메리죠."

섬 여행과 루시 모드 몽고메리

   "그 사람 때문에 <빨강머리 앤> 때문에 유명해진 거야. <빨강머리 앤>은 이 저자가 몇 번 출판사에 보내가지고 출판을 해달라 그랬는데 아무 소식이 없다가 한 군데에서 온 거예요. 그것을 했는데, 한 달 만에 재판이 나가고 몇 달 후에 열 몇 나라가 번역을 하고 이렇게 된 거예요. 그 전까지는 그 모드 여사가 할머니 밑에서 우편국에 취직을 하고 있었어요. 앤의 처지하고 같은 거예요. 유명해졌어. 가보니까는 몽고메리 여사가 다니던 우편국도 있고 소포가 있어요. 이렇게 원고 뭉치래. 소포 해가지고 이렇게 부쳤다 하는… 그러니까 그 <빨강머리 앤>에 나오는 그대로 빛나는 호수라든지, 오솔길이라든지, 그 다이애나 하고 같이 놀던 길이라든지 그런 것이 그대로 있어요, 재밌어요. 그대로 그 무대가 돼 있는 게. 그리고 또 그린 게이블즈잖아요. 초록색 지붕 집, 집도 초록색 집으로 만들어 놓고, 그래서 아주 좋았어요. 그때 그 참 근데 왜 그렇게 늦게 갔느냐 하면은 일본이 워낙 그 <빨강머리 앤>이 유명해가지고 일본 사람들이 8월 여름에는 그냥 쇄도를 하는 거야. 거기 그래가지고 쬐그만 섬이니까는 호텔을 잡을 수도 없고, 비싸기만 하고. 근데 9월이 되면 싸지니까는 그때 가자고 제자가 전화를 했어요. 그래서 시즌이 지나고 난 다음에 갔지요. 그랬더니 뭐 정말로 호텔도 싸데요. 아주 좋은 호텔이 우리 친구가 운전을 잘 하니까는 렌터카 해가지고 그래 가지고 그 섬을 일주를 다 하고, 유명하다는 곳 다 샅샅이 돌았어. 사진 다 찍어가지고 오고, 그 친구가 찍었어. 그랬어요. 그리고 묘지가 거기 있어요. 몽고메리 여사는 할머니한테서 자랐기 때문에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결혼을 못 했어요. 왜 그러느냐면 서른 몇 살 때에 어느 목사하고 어 약혼을 했는데 할머니를 혼자 두고 결혼을 할 수가 없어서 돌아가실 때까지 못 한 거야. 그러니까 마흔이 넘어서 돌아가셨어. 그렇게 되고 결혼 생활이 별로 재미없었다고 그래요. 재미없었고. 아들이 하나 있는데, 또 하나 마음 아팠던 것은 남편이 목산데 그 목사가 나중에 우울병에 걸려가지고 루시 여사를 마음 아프게 했고, 또 아들이 또 여러 가지로 잘 자라지 못했나 봐요. 그렇게 됐고 그러고 작품의 세계에 비해서 가족생활은 별로 행복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장미영) "그러니까 문인 한 사람이 작품 하나를 만드는 걸로 끝내는 게 아니라 그 지방을 다 살렸죠."

에밀리 시리즈 번역 이야기

   "한 두어 개 더 했어요. 그것이 뭐냐면 <에밀리>라고 하는 거 하고. 또 하나 <루시>라고 하는 거 있었어요. 몇 개가 있었는데 그것도 다 해달라고 출판사에서 하두 졸라서 했는데 <빨강머리 앤>만큼 여기서도 우리나라에서도 읽히지 않았어요. 오히려 그 <에밀리> 같은 거는 <빨강머리 앤>보다도 성숙한 이야기예요. 그리고 좀 철학이 있는 그런 건데. 나는 참 그거 하면서 참 재미가 있었고, 또 하나는 이것이 어떤 면에서 더 좋은 작품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했는데. 독자는 안 그렇더라고. 근데 어떤 사람들은 그걸 읽고 아, 이게 더 좋다고 말하더라고. 근데 거기에서요, 내가 참 인상적인 것이 그 에밀리가 아버지하고 단 둘이 살아요. 아버지하고 단 둘이 사는데 어머님 일찍 돌아가지고 워낙에 캐나다라고 하는 데가 그렇지만은 나무가 많고 그리고 광활하고 뭐 이런 데지요. 숲속에서 아버지하고 둘이서 사는 거예요. 그런데 아버지가 몸이 아파서 돌아가시게 되는 거예요. 아버지는 어린 에밀리를 두고 죽는 걸 생각하니까 참 가슴이 아프잖아요. 오로지 에밀리도 아버지하고만 생활이 아주 일체처럼 사는데, 근데 그 아버지가 얘한테 자기가 우리가 이별할 날이 왔다고 얘길 해야 되는데, 그걸 그 애는 너무 천진하고 이러니까 차마 말을 못하고 있다가 그러나 점 점점 시기가 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해야 되는데 해주는 얘기가 너무 멋있어요. 뭐라고 얘길 했냐하면은 아주 간단한 얘기지만은 ‘에밀리야, 내가 사정이 있어서 아주 멀리 가야 되겠다.’ ‘아버지, 나도 데리고 가지.’ 그래요. 그러니까 ‘너는 데리고 갈 수 없고, 너는 나중에 와야 된다. 내가 천천히 갈 테니까 너는 나중에 오너라.’ 그런 말이 나와요. 내가 되도록 천천히 가면서 너를 기다릴 테니까 그런 식으로 얘기를 하는데 그게 참 그런 식으로 해가지고 결국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다음은 혼자서 생활하는 그런 내용… 그러니까 아마 몽고메리 여사는 자기가 고아였었기 때문에 그런지 모르지만 그런 이야기 참 많아요."

 참고 도서 : 하얀길 (대교출판, 2001) - 권말에 신지식 여사의 프린스 에드워드 섬 여행 사진 및 자세한 프로필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신지식 여사의 인터뷰 중 나오는 창조사 사장은 최덕교 선생이었고 학생잡지 '학원사' 편집주간과 부사장을 거쳐 '창조사'를 설립하여 한국 출판문화계를 선도했습니다. 1963년 창조사 설립시 기획되었던 도서들 중 <빨강머리 앤>은 창조사 최초의 베스트셀러였고 전집 시리즈도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80세가 넘은 나이에도 '한국잡지백년(현암사, 2004)'을 저서로 남겼고 2008년 별세하셨습니다. 최서래 교수가 그의 장녀입니다.

* 출처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http://www.arko.or.kr/ (위에 채록된 신지식 여사님의 텍스트는 개인적 조회와 용도 외 상업적 용도로 사용될 수 없습니다. 출판, 인용 등 다른 용도로 사용하실 분은 신지식 여사님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허가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Copyright 2007 Shin Ji Shik - Arts Council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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