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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문학사이] '빨강머리 앤'

[중앙일보] 2004년 02월 06일 (금) 21:13:21

[중앙일보 이은희 <과학저술가>] 맛, 향기, 꿈, 정(情), 사랑, 느낌, 관계….

처음 '과학과 문학 사이'란 코너를 시작하면서 떠오른 단어들이었다. 지극히 문학적이고 인간적인 단어들, 다시 말해 과학의 차가움과는 관계 없을 것 같은 단어들이다. 그러나 나는 조금 생각이 다르다. 우리의 삶, 우리 일상의 모든 것의 이면에는 과학이 있고, 삶 자체의 구성이 과학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단어들 속에서도 과학적인 냄새가 풍겨난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 코너에서는 가장 인간적이라고 생각되는 단어들을 실마리로 잡아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한다.

사람은 나이를 먹고 자라게 되면 짝을 찾고 부모가 된다. 부모가 제 몸으로 낳은 아이를 사랑하고 아끼며 소중하게 키우는 것은 생물학적으로는 매우 당연한 일이다. 생물체는 영원히 살 수 없기에 자신의 유전자를 존속시켜줄 다음 세대를 보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흔적을 남기는 것일 뿐만 아니라, 생명체의 가장 중요한 욕구이자 생존 목표가 된다. 모든 것이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은 극단적인 유전자 결정주의로 비칠 것 같아 조금 조심스럽지만, 생물체의 삶이 어느 정도까지는 유전자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심지어 가장 인간적인 감성인 모성까지도.

영국 케임브리지대 연구팀은 쥐에게서 모성을 나타내는 유전자를 발견해 이를 메스트(Mest)라 이름지었다. 이 유전자에 문제가 생길 경우, 어미 쥐들은 새끼에게 먹이를 주지 않거나 어미 곁에서 떨어진 새끼 쥐를 찾는데 적극적이지 않은 등 새끼 양육에 문제를 보이곤 했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 하버드대 연구진들도 fosB라는 유전자를 없앤 생쥐들의 경우, 갓난 새끼들을 돌보지 않고 방치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런 유전자들이 결핍된 쥐의 새끼들은 신체적인 결함에서가 아니라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해 대부분 죽고 만다. 쥐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이와 비슷한 유전자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는 이 모성 유전자가 결핍된 사람들이 부쩍 늘어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어머니에게 학대받는 아이, 아버지 손에 죽는 아이들의 기사가 심심찮게 들려온다. 남도 아닌 친부모가 제 손으로 제 아이를 죽이는 세상, 뭔가 세상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고 있는 것이다.

초록색 지붕집의 마릴라와 매튜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고아에다 주근깨 투성이 빨강머리 소녀를 가족으로 받아들여 엄격하지만 따뜻하게 돌봐주었고, 소녀 역시 바르고 똑똑하게 자라난다는 이야기. 우연히 서점에서 어릴 적 보던 '빨강머리 앤'이 시리즈로 다시 나와 세트로 구입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부분인, 고아 소녀 앤의 어린 시절과 퀸 학원을 졸업하는 이야기를 1권으로 시작해 앤의 처녀 시절, 결혼, 아이들의 이야기와 중년 시절까지 모두 그려진 10권의 완전판 이야기였다.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듯한 평범한 사람들이 엮어가는 세상은 따스하고 포근하다. 우리는 도대체 어느 순간에 내 아이를 넘어, 다른 이웃들까지도 사랑했던 그 따스한 마음을, 그 유전자를 잃어버렸을까. 마릴라와 매튜, 그리고 앤과 그 가족들이 엮어가는 이야기를 살펴보며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았던 어린 시절을 추억해 보고, 자신이 어떤 어른이 되어있는지를 한번쯤 음미해 보는 것은 어떨까.

이은희 과학저술가 - Internet Media Company Joins.com, ⓒ 2004 중앙일보 & Joins.com

덧글

  • 2004/07/14 13:18 # 삭제 답글

    담아갑니다. 즐거운 하루되세요
  • 로맨티스트 2019/11/16 16:49 #

    보람 있는 일과 만드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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